송파 올림픽공원 앞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까지. 누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저마다 손으로 쓴 '재선거' 도화지를 들고 있었다. 한 청년의 말이 오래 귓가에 남았다. "참정권이 무너지면 자유민주주의도 같이 무너지는 거잖아요."
지난 6월 3일, 우리는 사상 초유의 장면을 목격했다. 투표소를 찾은 국민이 투표용지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선거관리위원회 스스로 인정한 것만 전국 50곳, 그중 22곳에서는 투표가 잠시라도 멈췄다. 서울 송파의 한 투표소에서는 오후 1시께부터 용지가 동나 줄을 선 유권자들이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하고 싶어도 종이가 없어 못 했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선거는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투표소 문 앞에서 돌아섰다면, 그것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한다고 적고 있다. 그 한 줄이 무너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분노했고, 그 분노는 서울을 넘어 전국의 광장으로 번지고 있다.
선관위는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노태악 위원장은 지난 5일 대국민 사과와 함께 사퇴 의사를 밝혔고, 외부 인사 9명으로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겠다고 했다. 용지가 부족했던 이유로는 폐기와 보관 과정의 낭비, 탈취 위험 따위가 거론됐다. 투표소별 사전투표율조차 제대로 따지지 않고 용지를 일률적으로 찍어냈다는 해명이었다. 국민의 한 표를 다루는 기관의 준비가 고작 이 정도였다는 사실이, 사과보다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정치권은 들끓고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마스크를 쓴 채 조용히 올림픽공원을 찾아 시민들 틈에 섰다고 한다. 손에는 직접 쓴 '재선거' 팻말이 들려 있었다. 그는 "이제 재선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고 했다. 이상일 용인시장은 페이스북에 "투표용지가 없어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 사상 초유의 사태"라며 대통령의 사과와 엄정한 진상규명, 책임자 문책을 촉구했다. 원외 당협위원장들도 한목소리로 진상규명과 선거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물론 선관위는 "재선거 사유는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절차적으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제도의 문장만으로 무너진 신뢰가 메워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선 것은 법조문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 한 표가 제대로 지켜졌는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 아무도 또렷이 답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정쟁의 도구로 삼거나,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키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광장의 시민들이 지키려는 것은 특정 정당의 유불리가 아니라 선거 그 자체에 대한 신뢰다. 바로 그렇기에 진상규명은 누구도 시비 걸 수 없을 만큼 투명해야 하고, 책임은 분명하게 물어야 한다. 선관위 직원 몇 명을 바꾸거나 위원장 한 사람의 사퇴로 덮을 일이 아니다. 시스템과 관행, 문화까지 도려내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광장에 다시 선 시민들의 표정은 무겁고도 단단했다. 그들이 외치는 두 글자, '재선거'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국민이 제 한 표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선거 — 그 당연한 약속을 다시 세우는 일은 더는 미룰 수 없다. 정부도, 선관위도, 정치권도 그 목소리를 똑바로 들어야 한다. 다시는 국민이 투표용지가 없어 광장에 나와 분노하는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지 않도록.






